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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사 40:1-11/ 서명성 목사/ 미국캘리포니아 팔로마한인교회/ 2010-11-28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10-12-01   조회수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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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40:1-11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지난 23일 있었던 북한의 연평도 도발로 인하여 해병대원과 민간인 4명이 희생됐습니다. 목숨을 잃은 고 문광욱 일병의 아버지와 기자와의 전화내용이 인터넷에 실렸습니다. 아들 문 일병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신 게 언제십니까? 지난 일요일 오후 4시였습니다. 무슨 얘기 나누셨습니까? “엄마, 아빠, 저 걱정하지 말고 건강히 잘 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내일 장례식이 있는데 아드님을 떠나보내시면서 한마디만 해주시죠. "이념과 사상이 없고, 총구가 없고 싸움이 없는 좋은 곳에 가서 발 뻗고 잤으면 좋겠습니다." 사망한 또 다른 병사인 고 서정우 하사의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난 안 할랍니다”하며 차마 아들의 유골 위에 흙을 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유족의 도움으로 흙을 뿌리기 시작한 아버지는 흙을 한줌 한줌 정성스레 뿌리다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천안함 유족들이 찾아와 그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주변을 숙연케 했고 유족들은 안장식이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아들들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무슨 말로 위로하겠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진정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주변에 슬픔을 당하거나 연약함을 겪는 사람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다림에 대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이리저리로 안타깝게 방황하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시 130: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지 못하고 깨어서 망을 보아야하는 파숫군이 어서 아침이 왔으면 기다리는데 그 파숫군의 기다림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무엇을 기다립니까? 경제가 언제 풀리려나 하며 경제 회복을 기다립니까? 언제 병에서 낫나 하며 육신의 회복을 기다리십니까? 하나님은 때로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면서 우리로 인내하며 소망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Advent 즉 대강절입니다. '대강'은 오는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성탄을 준비하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주변 상황을 보면 기뻐할래야 별로 기뻐할 것이 없고 감사할래야 별로 감사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위로하십니다(1~2절)

본문의 저자인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에 활약하였던 선지자입니다. 100년 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생생하게 예언하면서 세상의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메시야의 오심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사야서는 66권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1~39장 그리고 40~66장으로 나뉩니다. 전반부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다룬다면 후반부는 포로민들에게 용기와 위로 그리고 회복을 위한 소망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포로 귀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 즉 메시야를 통한 회복까지 외칩니다. 이사야 40장은 회복을 다루는 후반부의 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범한 죄 때문이었으므로, 죄 문제가 해결될 때 그들은 진정한 회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다시 비참함이 없는 진정한 안식을 누린다고 합니다.


40장의 개역성경 번역은 서술체로 되어 있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데 원래는 아름다운 시가체로 쓰였을 뿐 아니라 매우 극적이며 장엄한 문체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1절) 하면서 우렁차게 시작합니다. 지금 이 소리를 듣는 대상은 이스라엘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백성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다 포함합니다. 1절의 '내 백성'은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멀리 쫓아내실 때는 ‘이 백성’이라 불렀는데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면서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에게 위로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만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즉시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징계를 받아 나라를 바벨론에 빼앗기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서 생활한지 70년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살아남았지만 앞날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를 경험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전하십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출애굽의 재현이며 제2의 출애굽으로 간주됩니다. 첫 번째 엑소더스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먼저 자기의 종 모세를 보내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포로가 된 자기 백성을 향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 고역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말하라 예루살렘의 심장을 향하여

부르짖으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실로 그 복역이 끝났도다!

실로 그 죄악이 사해졌도다!

실로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그 모든 죄의 값을 갑절이나 받았도다(2절)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은 그 심장부에 해당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소가 있고, 다윗 왕의 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다윗 왕위는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입니다. 그곳에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다윗 왕위가 다시 세워짐으로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복역이란 죄를 짓고 갇혔다가 형기를 채우면 다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이 포로로서 고통을 당하면서 약 70년이 지났습니다. 복역이기 때문에 죄값만 지불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그의 복역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그의 죄가 용서되어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값을 고난으로 갚게 하셨습니다. 이제 작정한 기한이 지나서 죄 값을 다 치르고 하나님이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십니다(3~5절)

구약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포로기 동안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끌려가고 나니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선포하십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구원받기 원하는 모든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포로기 동안에는 만날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이 이제 나타나시기로 약속하시니 백성들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애물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백성들은 준비해야 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절)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는 것을 길을 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는데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위대하고 큰 왕이 지나는 길이니 더 잘 준비해야 합니다. 광야의 길이 강조되는 것은 출애굽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인 바벨론에서의 탈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고 다시 지어진 성전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기 위해 거쳐 가시는 광야에서 준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려면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골짜기가 깊이 패였으니 돋우어야 합니다. 산과 언덕은 낮아져야 합니다. 높은 곳은 낮아지고 낮은 곳은 높아져서 평지가 되어야 하나님이 온전히 지나가실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산이 있고 골짜기가 있습니다. 길을 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대로가 열리게 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5절)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 임재의 다른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출애굽 때에도 강하게 부각된 이미지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나타났으며 그 후에 성막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올라서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출 바벨론에서 제2의 엑소더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다시 인도하고 그 뒤에 이스라엘이 지나갑니다. 신약에서 엑소더스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막을 치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백성들은 독생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무너뜨리십니다(6~8절)

바벨론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보내어 '외치라'로 명령합니다. 그가 외치는 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능력이 있으며 그것으로 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전령자는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줍니다. '풀은 마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풀과 꽃과 같이 한때 바벨론에 전성기가 있었지만 이제 시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생에게도 예외 없이 해당됩니다. 인간의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풀과 같은 육체에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거나 풀의 꽃과 같은 영광을 붙잡으려고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바벨론과 그 백성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시로코'라는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불면 싱싱하던 풀들도 다 시들어 죽습니다. 사막의 풀이 그 바람에 마르듯이 사막에 솟아있는 왕국 바벨론도 여호와께서 보내는 바람에 의해 맥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본문은 풀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시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8절).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지 않습니다. 바벨론 성은 무너질 것이고 이것을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은 굳게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것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귀환하십니다(9~11절)

높은 산에 오르라, 너 소식을 전하는 자여!

예루살렘에 소식을 전하는 자여, 소리를 힘써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말하라!

"보라 너희 하나님을"(9절)

이번에는 전령자를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온 성읍이 더 듣도록 높은 곳에 올라서 크게 외치라고 합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을 두 가지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1) 왕의 이미지

예루살렘에 돌아오시는 여호와의 첫 번째 이미지는 왕입니다. 예루살렘은 현재 폐허가 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으로써 성은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외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을!" 떠나셨던 여호와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10절) '팔'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대적에게 농락당하였던 예루살렘과 유다가 다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열 재앙으로 바로의 신들을 무너지게 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악한 세력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강한 팔로 적들을 다스리십니다. 예루살렘이 귀환민들에 의해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와의 통치가 다시 시행됨으로써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도성으로 돌아오시는데, 마치 전쟁에서 돌아오는 개선 왕처럼 묘사됩니다. 그는 노획물들을 싣고 와서 공로에 따라 백성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2) 목자의 이미지

여호와의 두 번째 이미지는 목자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과 솔로몬 왕이 사라진 이후로는 목자다운 목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믿고 보냈던 왕들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백성들의 진정한 목자로 오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진정한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셔서 샬롬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왕과 목자의 이미지는 원래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왕이 되시며 진정한 목자 되시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꿈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목자의 역할은 양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줍니다. 이를 위해 목자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목자는 또한 양을 먹여줍니다. 목자는 양을 이끌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가짜 목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삯군이었습니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제 양이 아니기에 이리가 오면 양을 돌보지 않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참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시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거짓 목자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지만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목자가 되셔서 평화와 풍성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선한 목자상은 재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본문에 의하면 대강절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1) 온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하는 때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시면서 위로를 선포하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바벨론은 여전히 강합니다. 회복을 외치라는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에 예언자는 회의적으로 묻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치리이까?" 지난 70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무슨 변화가 나타나겠냐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8절) 회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죄를 졌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그러한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의 값을 치르시며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통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인간들에게 용서가 선포되고 위로의 메시지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강절에 우리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새 시대, 회복의 시대가 왔음을 전해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이 시대를 향해 주님이 위에서 부어주시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만나기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위하여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는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약속된 메신저였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엘리야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요한의 모습 속에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을 위하여 오래 전부터 준비하시고 때가 되니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 말과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광야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 받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대강절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나님이 임하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대면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더 이상 갈등, 반목, 시기, 다툼, 질투가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가정에,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 동료들과 일하는 직장에, 소외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 것을 선포하는 때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시고 영원한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어가던 땅이 회복되고, 좌절했던 자들이 소망을 갖게 됩니다. 대강절에 우리는 왕 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찬양하며 그분의 왕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고 예루살렘에 전해야 합니다. 복음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외쳐야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은 신약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힘써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대강절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지연되고 상실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목마른 영혼들, 위로가 필요한 영혼들, 삶의 길을 잃은 자들, 이 모든 자들에게 주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온갖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님의 길을 준비함으로 그분이 다스리시는 샬롬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귀한 믿음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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