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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샘플 3 (참된 예배란 무엇입니까?/전5:1-7/박조준 목사)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9-04-18   조회수 : 1607
참된 예배란 무엇입니까?/전5:1-7/박조준 목사

참된 예배란 무엇입니까?
전5:1-7
박조준 목사





요한복음 4장을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한 번은 사마리아 지방 수가 동네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은 점심을 장만하기 위해서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은 사막 지역이어서 낮에는 무척 덥습니다. 그래서 물을 긷는 여자들도 아침이나 저녁이 비교적 서늘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해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뜨거워서 움직이기도 싫은 대낮에 어떤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을 향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통찰력이 빠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보통 여인들이 물 길으러 나오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서 물 길으러 나오는 그 여인이 보통 여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이여, 나에게 물 좀 줄 수 없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물 달라는 남자를 보니 그는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하는데 어떻게 나더러 물을 달라 하시오?”
“당신더러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나에게 물을 주었을 것이요. 당신이 이 우물에서 길어 마시는 물은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아요.”
“아니,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더구나 우리가 조상에게 물려받은 이 우물은 이렇게 깊은데 어떻게 물을 긷는다 하세요?”
“내가 주는 물은 그 배에서 생수가 되어 솟아나요.”
“아, 그래요? 그러면 그 물을 나에게 좀 줄 수 있어요?”
“당신 남편을 불러오세요.”

이 말씀은 이 여인의 삶에서 가장 아픈 부분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저는 남편이 없는데요.”
“맞아요. 과거에 당신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댔소. 그리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때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이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인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마시오.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진정한 영적인 지식이 없이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이 없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예배하려고 할 때 종종 우리의 예배는 우상 숭배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알고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구원은 유대인을 통해서 난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truth”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 내가 정말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진정한 진리를 붙잡기 위해서 진리를 경청하며 진리를 통해 도전받기 위해서 진리 안에서 예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하고 있고 예배의 참된 내용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보고 있는가”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세계적인 지성의 도시, 모든 지식과 철학이 숨쉬는 곳이었던 그리스의 아덴을 방문한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도시를 걸어 보고 그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도시의 도처에는 우상의 신당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성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신을 추구하는 깊은 종교적인 본능 때문에 이런 수많은 신당과 우상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은 다 우상이야. 헐어 버려!”라고 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종교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신들을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두루 다니며 당신들이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소. 그러므로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당신들에게 알게 하려 하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여러 신에게 예배하는데 그 신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가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변화되도록 초청하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참된 예배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참된 예배 정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정신을 나타내는 핵심이 됩니다.
전도서 5장 2절을 보세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이 예배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메시지가 우리의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전에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참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위대한 종교 개혁자 요한 칼뱅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이 경외감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마다 똑같이 지적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무의미는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데 대한 각성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느냐 하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드릴 때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식을 가지십니까? 이런 의식이 없이 예배드린다면 그것은 사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참석했다고 해서 예배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드리기 전에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이 떠오를 때 그 다음에 기도가 시작되고, 찬양이 시작되고,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다고 믿어져 “아멘”으로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에 따라 예배의 상태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를 때는 이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조차 생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전도서 기자는 참된 예배 정신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무엇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알지 못하고 무조건 제사라는 형식에 참여하는 것보다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을 전합니다만, 저도 이 말씀을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면서 전합니다. 예배하러 나아올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오셔야 합니다.

중세기를 교회사적 견지에서 볼 때 소위 암흑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예배당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까지 남아 있는 문자 그대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훌륭한 예배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는 거의 교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성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말합니까? 중세기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단순히 형식 속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중세기 교회사의 비극입니다. 종교개혁의 기여는 의식 중심의 예배에서 다시 말씀 중심의 예배로 그 예배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수많은 미사, 수많은 의식, 점점 더 크게 화려하게 짓는 성당, 더 복잡해지는 사제들의 복장 그리고 더 많은 형식적인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려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말씀을 통한 변화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이 가져온 비극이 교회의 암흑시대를 이루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 선포할 때 졸지 않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들음은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하실 때 그 요구를 따라서 지금까지 해 오던 나의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도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을 보면 사무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드려졌던 많은 예배가 생명을 잃고 의미를 잃어버린 이유, 오늘 주신 말씀대로 헛되고 헛된 것으로 변신하고 있던 중요한 이유는 말씀 듣는 일이 없었고 말씀 순종이 결여된 채 단순히 의식 중심의 예배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봉독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성경이 봉독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들은 일어서서 이 말씀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로 그 말씀을 받습니까?

목사는 전달자입니다.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주실 것인지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께 붙들려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 그를 통해서 전달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그래서 내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의식에 몰두한 데 있습니다. 의식은 점점 복잡해 갔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졌습니다. 생명의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를 통해서 변화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부패밖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2절에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고 엄숙한 것이고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질적인 차이가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예배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주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등한함에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 예배의 약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결핍에 있습니다.” 심각한 충고로 받아들여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버릇없이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만나면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상대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접하는 순간,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며 제일 먼저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이다.” 이것은 죄의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의 고백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경험 속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 있었습니까?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저 죄 짓는 사람인 세리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응답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직하지 못했습니까? 그는 지금 하나님을 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순간 상대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내가 발견될 때 우리가 토해내야 할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쳐다볼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열납하시고 응답하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합니까? 주를 경외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전도서 기자는 실제적인 충고를 했습니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는 것을 배우세요. 잠잠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체험이 얼마나 엄숙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삶을 결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결단이란 말 대신에 ‘서원’이란 말을 썼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도 “서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서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실 때, 그래서 내 심령이 움직일 때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하는 서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한 뒤에는 그 서원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비극은 많은 사람이 서원을 하면서 이 서원에 대한 이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들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씀 앞에 구체적으로 내 삶을 고치기 위해서 어떤 결단을 하셨습니까? 그 결단이 오늘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가고 있습니까? 참된 의미의 서원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헛된 서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8절 이하의 내용이 그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너는 어느 도시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웃을 멸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정의를 억압하고 진리를 비웃고 경멸하는 이유는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느끼지 못해서 그럽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삶의 현장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배는 무지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진정한 영적인 지식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앎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9절 이하에 보시면 주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수많은 천사들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합당하오니”라는 말이 영어로 ‘worthy’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게든지 예배라는 말이 사용될 때 그 순간부터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너무 감격해서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인 9절을 보세요.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 엎드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이제는 이 예배를 실천하기 위해서 떠나갑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이것이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한 주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축복의 기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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