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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샘플 1 (왜 선교해야 하나?/마28:19-20/조용기 목사)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09-04-18   조회수 : 1361
왜 선교해야 하나?/마28:19-20/조용기 목사

왜 선교해야 하나?
마28:19-20
조용기 목사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선교해야 하나?” 그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가끔가다가 뉴스를 보면 깊은 정글에 비행기가 불시착한다든지 대양에서 배가 조난을 당하면 해당국가에서는 물론 주변국에서 헬기나 비행기 선박을 동원하여 실종자를 찾는 대수색을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종한 어린이를 찾기 위하여 그 부모는 직장도 직업도 버리고 전국을 누비며 애타게 찾는 모습도 우리가 가끔 보는 사실입니다. 2천년전에 하나님은 실종된 인생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마다 누비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인생을 찾아 애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를 잃어버린 상황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인생에 관하여 프랑스의 문필가 몽테뉴는 “인간은 전세계를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리학자 칼융의 핵심질문 역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이것이었습니다. 칼융은 인간의 삶의 의미 즉,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할때까지는 의미없이 방황하며 허망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종교적인 인생관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해야 정신적인 질환도 치유받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늘 잃어버린 자기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찾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회복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론]

1. 잃어버린 정체성 회복

첫째로, 잃어버린 자신 즉, 정체성을 회복시키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선교해야 됩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주는 역사를 하는 것이 선교의 사역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삶을 가져왔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새로운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삶을 찾게 하는 것이 선교요, 전도인 것입니다. 아담이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방황하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마귀의 손에 잡혀서 고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정체성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있을때는 거울을 들여다 보면 자기가 누군지를 볼수 있잖아요. 오늘도 여러분 모두다 거울을 보고 오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거울을 잃어 버리면 벽을 보고 아무리 자기를 찾으려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쳐다봐도 땅을 쳐다봐도 자기가 누군지를 볼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아~ 내가 저분과 같구나!’ 하는 것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자기 모습을 알수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을 잃어 버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거울이 없으니 자기 모습을 못보듯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오늘 안믿는 사람을 붙잡고 길거리에서 물어 보십시오. “당신이 누굽니까?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새로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것을 내가 알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아담의 자손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실된 인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겠지만은 예수 안에서는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으니 그 새사람이 누군가를 우리가 알고 전해야 될것입니다. 그 새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새사람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전에는 죄인이었고 죄의 종이었으며 정죄를 받고 마음이 고통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때를 밀어도 밀어도 희어지지 않는 피부색깔과 같습니다. 얼마전에 혼혈인생을 슬프게 살았다는 40대의 혼혈 우리 동포가 간증하는 것을 텔레비젼에서 보았습니다. 자기는 어릴 때 검은 피부를 희게 하려고 시냇가에 가서 모래로 손을 비벼서 손에서 피가 나와도 검은 피부는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아무리 노력을 하고 고행을 하고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희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의 죄가가 다 사함을 받고 마음에 정죄의식이 사라지고 용서받고 의인이 됩니다. 누더기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찬란한 의의 옷을 입은 자가 새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나의 새로운 정체성은 용서와 의와 하나님 영광을 옷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은 거룩하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에 끌려 다니며 온갖 추하고 더러운 일을 다하고 온갖 세상의 풍습에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벗을수 없는 옛 아담의 후손인데 예수 안에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고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어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압박과 서러움에서 오랫동안 노예생활하던 우리들이 세상의 고리에서 끊겨 나오고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받고 성령이 오시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란 성령을 받고 거룩하게 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믿고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은 어떠한 사람인 것입니까?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병들어도 어찌할수 없어요. 약으로 못고치고 병원에서 수술로 못고치면 운명적인 환자가 되고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병의 노예가 되고 고통되었으나 새로 지음을 받은 새로운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료함을 받은 나의 새로운 사람을 소유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채찍에 맞았습니다. 선지피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주님은 채찍으로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2천년 전부터 이미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간 병을 또 우리가 새삼스럽게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훨훨 질병을 털어 버리고 마귀와 병을 꾸짖어 물리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료함을 받은 새사람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체성은 치료함을 받은 건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또 새로운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난과 저주에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느곳에 가나 가시가 우리를 찌르고 엉컹퀴가 몸을 휘어 감았습니다. 가난과 저주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산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비극과 고통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도 가난하고 몸도 가난하고 생활도 가난하고 저주에 휘휘 감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이것을 벗을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저주를 속량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저주, 나의 저주, 우리의 저주를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가시관 쓰시고 가시에 박히시고 몸찢고 피흘려서 저주를 청산해 버리고 만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칠 때 저주는 철렁철렁 떨어져가고 만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복받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고 영생천국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영원한 어두움의 지옥속으로 곤두박질 치고 떨어져 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에 찬란한 광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사흘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캄캄한 그길은 환한 부활의 광명으로 비추이게된 것입니다. 사망은 없습니다. 흑암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 안에는 광명한 천국길밖에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집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는데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우리는 두려워 할수 없는 것은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비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집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선교는 정체불명의 사람으로 마귀에 끌려 다니는 사람을 찾아 예수믿고 하나님이 주신 새 정체성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 누구요?” “모르겠어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요?” “모르겠어요.” 정체불명의 사람입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마음대로 포로를 잡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요. 그러나 내가 정체가 분명하면 그러지 못합니다. 나는 예수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과 마귀에서 해방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는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에서 벗어나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얻은 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고백할수 있으면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두움에서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알고 자기의 형편을 알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줄 안즉 자기 갈길을 편히 알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는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잃어버린 사람이 온 세상에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고 선교사를 보내셔서 구석구석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정체성을 회복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거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는데 아직까지도 이를 모르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2. 자화상 회복

둘째로, 선교는 자화상을 회복시켜 주는 운동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 생겼으면 자식들도 대게 잘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가 알려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생겼구나!”하고 알 수 있는 자화상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고 버림받았을때는 하나님을 바라볼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어떠한 모습인지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화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늘 보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자화상을 가지고 마귀처럼 부정적이고 죄짓고 비뚫어지고 좌절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된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한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자기 모습을 깨달은 인생이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자기 자신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못나가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므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겉만 번지르 하지 속은 텅비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생은 허수아비 인생이 되고 만것입니다. 허수아비는 뭡니까? 논이나 밭에 새나 짐승을 쫓기 위해서 짚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겉은 찬란하게 입히고 좋은 모자를 씌웠으나 가보면 생명이 없고 속은 지푸라기 밖에 없고 텅비었습니다. 인생이 어떻습니까? 겉은 요란하게 찬란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온갖 것을 다 행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의 가슴은 텅비었습니다. 사람의 가슴은 비고 혼돈되고 마귀의 흑암의 세력이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적으로 모두다 절망에 처했습니다. 텅빈 가슴을 안고 그 허무와 공허를 채울수 없어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헤밍웨이는 부귀와 명성을 다가졌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서 네 번이나 이혼하고 네 번이나 결혼했지만 61살에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면서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공허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한 허수아비 인생은 결국 삶의 공허와 허무만을 안겨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인과 바다’를 지은 헤밍웨이처럼 겉에는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를 다 가진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렇게 요란스럽게 말하지만 모두다 속에 고칠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허무와 무의미와 공허로 꽉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텅빈 자화상을 갖고 사는 인생은 허무로 말미암아 자살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매년 3만명씩 자살합니다. 어느 전쟁이 일어나서 매년마다 3만명씩 죽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국제적인 큰 문제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만 해도 매년 3만명씩 자살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스칸디나비아제국도 역시 해마다 자살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의식주 문제로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허무와 무의미를 이기지 못하고 텅빈 자화상 때문에 몸서리치다가 자살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최근에 들어서면서 자살증후군이라는 무서운 풍조가 퍼져가고 있습니다. 2004년 7월 현재 집단자살, 동반자살 등 자살로만 하루 평균 36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자화상을 잃어버린 공허한 인간은 결국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까지 버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무어라고 해도 텅비고 공허한 삶입니다. 아무리 요란스럽고 찬란하게 세상으로 꾸며 놓아도 마음에 빈가슴은 아무도 세상으로 채울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팠으나 물을 보존하지 못하는 깨어진 우물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을 버리고 난 다음에 공허한 그 삶속에 아무리 세상것으로 채워 놓으려고 해도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만족을 주지 못해요. 돈도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잠시 있다가 그만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그런 탄식의 시를 적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내용이 없을수록 외면이 더 요란하고 찬란합니다. 빈수레가 더 요란하잖아요. 그리고 사람들은 혼돈에 서 있습니다. 자화상을 잃어 버리고 자기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고 혼돈속에 있는 것입니다. 삶의 주소, 번지를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없는 삶은 혼미한 삶입니다.

불란서에 세계적인 철학자요, 수학자요, 과학자였던 파스칼이 지은 ‘팡세’라는 책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 ‘팡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 인간이여, 내가 비참해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찾아봐도 아무 소득이 없구나. 내 자신속에서는 진리도 선도 찾을 수가 없구나! 철학자들은 그것을 찾아 주겠다고 너에게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수 없다. 그들은 너의 참된 선이 무엇이며 너의 참된 간구가 어떤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네가 왜 비참한지 그 원인조차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의 불행을 건져줄수 있단 말인가!” 이 팡세라는 작품을 통해 파스칼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토로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훌륭한 과학자요, 수학가요, 철학가지만 자기의 마음속에 허무와 공허를 채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방황과 고뇌의 종지부를 찍은 후 파스칼은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해서 이런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요, 수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믿는 자의 하나님인 것을 내가 알아 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 그 앞에 엎드려서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품어 주시고 잃어 버린 자화상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 텅빈 가슴이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 형상을 회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으로 삶의 혼돈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공허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므로 매워지고 혼돈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어 줄수가 있는 것입니다. 흑암에 잡힌 인생은 누가 해방시켜 줍니까? 사람들은 아담, 하와 이후로 흑암의 세력인 원수 마귀에게 잡혀서 심신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잡혀 무신론자가 되고 유물론자가 되고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은 예수님이고 어두움은 마귀인데 예수님보다 마귀를 더 따라가는 이유는 마귀에게 잡혀서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흑암에 잡힌 사람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스스로 마귀의 사슬에서 풀려 날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수양과 도덕으로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 될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의 창시자였던 다윈은 주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던 마을의 주정뱅이들을 고쳐 보려고 자신의 집을 개방하기까지 하며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윈이 사는 동리에는 주정뱅이들이 많아서 밤낮 술주정을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요란스러웠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복음주의자요,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패간이라는 사람이 그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을의 주정뱅이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차츰 차림이 단정해지고 결국에는 술까지 완전히 끊었던 것입니다. 1년후 다윈은 패간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은 몇 년 동안에 걸친 우리의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단지 몇 달 동안에 해주었오. 우리는 결코 술주정뱅이를 교화시킬수 없었지만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 마을에는 술주정뱅이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과학은 인생가운데 자리했지만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증명했오.” 무신론자요, 유물론자인 다윈조차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술주정뱅이 한 사람도 교화시키지 못했지만 단순한 패간이라는 전도자 한 사람이 그 동리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도하므로 예수 이름으로 술주정뱅이가 다 사라지고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고 철창이 끊어지고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동리가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진실로 치료하고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오면 공허와 허무와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자화상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밝히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시편 103편 2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지라도 갈보리 산밑에 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보면 내 모든 죄가 다 사함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며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모든 병이 다 고침을 받고 치료와 건강한 사람이 되며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파멸에서 구속함을 얻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시고 좋은 것으로 내 마음에 소원을 만족게 해서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교회 왔다갔다 하면서도 독수리같이 새롭게 된 것이 아니라 병든 닭새끼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택을 잊어 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말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은택을 잊지 말기 위해서 생각이 바꾸어져야 되고 꿈이 바뀌어져야 되고 믿음이 바뀌어져야 되고 말이 바뀌어져야 되고 기도가 바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잊어 버리면 안돼요. 냉장고에 음식을 잔뜩 넣어두고 음식이 있는 것을 잊어 버리면 굶주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잔뜩 저금하고도 돈이 있는 것을 잊어 버리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행에 돈을 안찾아가는 계좌가 굉장히 많습니다. 가끔가다가 신문에 나오잖아요. 돈 안찾가아가는 계좌에 돈을 빨리 찾아가라고. 돈을 저금해 놓고 잊어 버리고 돈을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는데도 잊어 버리기 때문에 받지를 못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 들이기 바랍니다. 자화상을 새롭게 얻으십시오. 여러분 모든 죄가 용서받은 모습을 받으십시오. 모든 병이 고침받은 모습을 받으십시오. 여러분 생명이 파멸에서 건져지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좋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선물로 받아 독수리같이 새롭게 된 모습을 여러분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어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은 모습을 완전히 굳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또 모든병이 나은 모습을 굳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병에서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독수리같이 새롭게 된 모습을 마음속에 굳히시기 바랍니다. 파멸에서 건짐받고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을 받고 좋은 복을 받은 독수리처럼 펄펄 날아 오르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이것을 전하는 것이 선교요, 복음전도인 것입니다.

이사야 40편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므로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십시오. 자기의 자화상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공허하고 혼돈한 흑암의 자화상은 버리고 생각을 고쳐 먹으십시오. 여러분은 용서받은 의인들입니다. 치료받은 사람들입니다. 복받은 사람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은 자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굳건히 받아 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청년이 되면서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 물결에 휘말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노력하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세계와 인류역시 무한이 발전해서 지상천국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점점 허무해져 갔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기록한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떠나고 난 다음 나의 생활은 공포심과 혐오감과 심적 고통으로 꽉차 있었다. 나는 전쟁터에서 많은 살인을 했고 결투를 벌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도박을 하고 농노들을 희롱하고 착취했다. 나는 간통을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폭행과 살인을 했다. 내가 범하지 않은 죄는 하나도 없다. 나는 흉악한 죄인이다.” 예수님을 떠나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무한이 발전하고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그가 나중에 처참한 이그러진 자화상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갑작스런 형의 죽음과 많은 사형수들의 죽음을 본후 인간존재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신봉했던 철학과 과학을 통해서 답을 얻으려 했지만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와서 십자가 밑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화상을 새롭게 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참회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예수님을 버렸다가 처참하게 이그러지고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을 살다가 예수께 돌아오므로 텅빈 그가 가득해지고 이그러진 자화상이 바로서고 새로운 삶의 용기와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화상을 잃어버린 공허와 혼돈의 삶을 사는 인간이 살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자화상이 회복됩니다. 왜 예수를 전도하나요? 자기를 잃어 버리고 자화상을 잃어 버린 사람들에게 자기를 찾아주고 자화상을 복구시켜 주는 운동을 하는 것이 선교사역인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찾아주는 거울을 찾아서 자기 모습을 새롭게 보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자화상을 찾을 뿐 아니라 자화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올바른 자화상을 찾아주는 운동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새로운 신분을 가진 천국인

셋째로, 왜 선교해야 되나요? 새로운 신분을 가진 천국인이 된 것을 찾아주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아담의 자손들은 마귀의 자식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멸망받고 저주받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3대 재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죄와 죽음의 재앙, 저주와 가난의 재앙, 질병과 육체의 죽음과 음부에 떨어지는 재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은 바로 이런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고 난 다음 우리 신분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우리 다같이 한번 소리내어 읽으십시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인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신분을 얻습니까? 예수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택한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택하는 것입니다. 처녀가 남편을 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택하잖아요. 남자가 아내를 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택하잖아요. 좋아하지 않으면 안택합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택하지 않아요.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모셔 들이면 왕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망과 음부의 세력을 멸하고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갈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줄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우리가 얻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삽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마귀의 나라에서 삽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임금이 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소유하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소유하시고 성령은 우리를 인쳐서 등기이전을 하여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는 굴러 다니는 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귀하고 귀하게 간직하는 소유물이 된것입니다.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품고 계십니다. 이러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낙심하고 좌절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신분을 깨달으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기고 좌절감에서 일어나게 되고 어깨를 쭉펴고 살수 있잖아요.





[결론]

오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자기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을 압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기의 아름다운 자화상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바라보고 삽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알고 그 신분을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은총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고 이 받은 은혜를 땅끝까지 전도하는 것이 바로 선교사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은즉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전달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 빛은 예수님 안에서만 비춰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어떤 종교도 어떠한 형식과 의식도 철학도 도덕도 빛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새로운 자화상을 얻고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확인하고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당당한 지식과 믿음과 은혜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어둠에 사는 백성들에게 땅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선교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이 새로운 은혜속에 들어오게 하시고 선교를 하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는 31년 동안 선교사역을 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서 더욱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가는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 하여 주시옵시고 잃어버린 자아상을 찾게 하여 주시옵시고 잃어버린 신분을 찾아서 당당하게 인생을 승리로 살게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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