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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들의 명강의/ 치매/ 2004-07-04
작성자 : 운영자(kylggc@hanmail.net)  작성일 : 2017-01-30   조회수 : 107

노인들은 흔히 “벽에 똥칠하기 전에 어서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죽고 싶다”는 노인의 말은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말 만큼이나 속이 들여다 보이는 생 거짓말.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댓가가 치매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전문 직업인으로서, 한 가족의 어른으로서 자존감(自尊感)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가족도 못 알아보고, 어린애처럼 생떼를 쓰며, 추악하게 먹을 것에 집착하고, 대소변도 못가리게 되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 용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완전한 ‘인격의 무덤’이다. 세상사 갖은 환난고초와 맞닥뜨려 이겨낸 백발의 권위와 당당함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은 오히려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처럼 사랑했던 자녀들이 자신을 대신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하루 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간다. 화목하고 단란했던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 신뢰와 애정마저 송두리째 빼앗은채 파국으로 몰고가는 치매는 그래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노망들지 않고 죽는 것을 복으로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과 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치매가 오기 전에 빨리 죽는 것은 더욱 힘들어 졌고, 치매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무게로 인류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국어사전에선 ‘정상적인 정신능력을 잃어버린 상태’ ‘뇌 신경세포의 손상 등으로 말미암아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으로 상실된 상태’라고 치매를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감소하고, 심한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수가 있지만 이것은 자연스런 노화의 과정이지 치매가 아니다. 의학적으로는 기억장애가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장애, 방향감각 상실, 계산력 저하, 성격 및 감정의 변화 등 4가지 중 1가지 이상이 나타날 때 치매로 진단한다. 한편 우울증이 있을 경우에도 인지기능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지만, 이는 ‘가성(假性)치매’라고 한다. 우울증 증상이 회복되면 치매 증상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은 수 없이 많지만 뇌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와 뇌 혈관 여러 곳이 막혀 초래되는 혈관성 치매가 전체 치매의 90% 정도를 차지한다. 그 밖의 감염성 질환, 대사성 질환, 내분비 질환, 중독성 질환, 파킨슨씨병, 수두증, 간질 등이 치매의 원인이 된다. 서양의 경우 알츠하이머성 치매와 혈관성 치매의 비율이 8대2 정도로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우리나라에선 5대5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국내서도 혈관성 치매의 원인이 되는 뇌졸중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예방법의 확대로 차츰 혈관성 치매는 줄고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많아지는 추세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와 혈관성 치매의 증상은 기본적으로 비슷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다. 알츠하이머 초기엔 기억력만 깜빡깜빡할 뿐 운동능력이나 성격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또 치매가 진행되는 속도가 일정하다. 그러나 뇌졸중이 원인이 돼 발병하는 혈관성 치매의 경우, 기억력에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동작도 둔해지고 성격이 변하는 게 특징이다. 어떤 경우엔 기억장애보다 운동장애 등이 더 명확하다. 특히 기억력 장애와 함께 승용차 뒷좌석에 앉을 때 수월하게 앉지 못하고 동작이 굼뜨거나 걸음을 걸을 때 종종걸음을 걷는다면 혈관성 치매를 의심해야 한다. 성격변화는 얼굴 표정이 없어지고, 말수도 적어지고, 이상하게 게을러 지고, 계획성이 없어지고, 판단력이 떨어지고, 화를 잘 내게 된다. 그 밖에 물이나 음식 등을 섭취할 때 사래가 들리는 것(삼킴장애), 발음장애 등도 혈관성 치매일 경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기 단계를 지나 중기 이후 단계로 들어서면 알츠하이머나 혈관성 치매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중기 단계에 접어들면 금방 일어났던 일이나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전화받기가 어려워지며, 외출했다가 집을 찾지 못하거나, 이유없이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의심하는 행동(예를 들어 자기 물건을 남이 훔쳐갔다고 주장함)을 하게 된다. 병이 말기로 진행되면 초조, 흥분, 편집증적 망상 등의 문제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는 식구를 못 알아보거나, 변을 못가리거나,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음식을 제대로 못 삼키거나, 침대에 누운 채 생활하는 수가 많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일반적으로 초기 단계는 발병 후 1~3년째, 중기 단계는 2~10년째, 말기 단계는 8~12년째에 나타난다. 환자들은 짧게는 발병 후 3년, 길게는 20년까지 생존하며, 평균 8~12년 살 수 있다. 혈관성 치매의 경우 뇌졸중의 양상에 따라 생존 기간이 크게 차이가 나므로 일반화 할 수 없다. 치매 환자의 사망 원인으로 배회(徘徊)로 인한 교통사고나 추락 등과 같은 사고사가 흔하다.

그러나 이 보다는 폐렴이나 요로감염과 같은 감염성 질환이 더 중요한 사인이다. 치매가 심해져 자리에 눕게되면 면역성이 떨어져 폐렴 등 감염성 질환에 쉽게 걸린다. (음식물 등)삼킴장애로 인한 영양실조, 가래가 차지만 뱉어내지 못해 생기는 호흡곤란도 사망의 원인이 된다.알츠하이머는 1907년 이 병을 처음으로 기술한 독일의 정신의학자 알로이 알츠하이머의 이름을 딴 병명이다. 진단기준이 뚜렷하지 않았고 노인인구도 적어 당시만 해도 알츠하이머는 희귀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는 암, 심장질환, 뇌졸중 등과 함께 가장 흔한 사망원인이 됐다. 우리나라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5% 이상이 알츠하이머 환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알츠하이머는 건강한 뇌 세포가 서서히 죽어 생기는 병이다. 사람의 뇌는 약 140억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돼 있으며, 매일 5만개 정도씩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뇌 세포의 감소속도가 이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알츠하이머 환자의 경우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뇌를 부검해 본 과학자들은 죽은 신경세포 주변에 베타 아밀로이드란 단백질이 무수하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여기서 내뿜는 독성물질이 뇌 세포를 죽인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그렇다면 왜 베타 아밀로이드가 뇌 신경세포에 들러붙게 될까?
의학자들은 아직 그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단지 노화와 가족력(유전적 소인)이 베타 아밀로이드의 생성을 촉진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외국의 통계들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5~10%가, 85세 이상에선 35%~50%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으며, 따라서 노화는 알츠하이머의 가장 중요한 유발요인이다. 또 인간의 1번, 14번, 19번, 21번 염색체가 알츠하이머 발병에 관여하며, 가족 중 알츠하이머 환자가 있는 경우엔 알츠하이머 발병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밖에 머리의 외상, 고지혈증, 지나친 음주와 흡연도 알츠하이머를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의학자들은 추정한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IA)의 연구에 따르면 머리에 외상을 입었지만 기절(의식 소실) 시간이 30분을 넘지 않았던 사람은 2배, 외상을 입고 24시간 이상 의식이 소실된 심각한 두뇌 손상을 받은 사람은 4배 정도 알츠하이머 가능성이 높았다. 일본 연구팀에 따르면, APO-E4란 유전자가 있고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0배 정도 알츠하이머 발병 가능성이 높았다.알츠하이머가 무서운 이유는 예방과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의 예방을 위해 타고난 유전자를 개조할 수도, 늙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 코그넥스, 아리셉트, 엑셀론, 레미닐 등의 약들이 FDA 승인을 받아 알츠하이머의 치료에 사용되고 있지만 획기적인 효과는 없다. 이 약들은 환자 중 일부에게서지만 일정기간 기억능력을 개선시킬 수 있으며, 최소한 병이 악화되는 속도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는 속도를 줄인다는 얘기지 악화를 막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한달동안 100만큼 나빠질 환자를 한달반 또는 두달에 걸쳐 100만큼 나빠지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다. 병원에 온 환자들에겐 어쩔 수 없이 약을 처방하지만 약을 쓰나 안쓰나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것은 결국 마찬가지이므로, 의사가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치료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최근엔 비타민 E, 셀레질린 등 항산화물질, 항염증제제, 여성의 경우 여성호르몬 등이 알츠하이머의 진행속도를 늦춘다는 보고가 있지만 역시 파국을 막을 만큼의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유전자 치료다. 현재 잘못된 베타 아밀로이드를 양산하는 유전자가 밝혀지고 있으며, 그 유전자를 개조해 베타 아밀로이드의 생성을 차단하려는 연구가 줄기차게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며, 언제 환자 치료에 사용될 지 현재로선 짐작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방도, 치료도 불가능하다면 알츠하이머의 가공할 공포앞에 속수무책으로 떨고만 있어야 할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 켄터키 대학 데이비드 스노우든(David Snowdon) 박사의 ‘수녀(修女)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구팀은 수십년에 걸쳐 켄터키주에 있는 수녀원 수녀들을 면담했다. 또 뇌 기증을 약속받고 사후엔 그들의 뇌를 부검했다. 어떤 수녀는 치매 없이 사망했고, 어떤 수매는 경증의 치매인 상태로, 또 어떤 수녀는 중증 치매인 상태로 사망했다.

예상대로 생전의 인지기능과 뇌 세포의 파괴 정도는 대부분 비례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깜짝 놀랄만한 사례가 몇건 발견됐다. 생전에 치매 증상이 전혀 없던 수녀가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예상외로 뇌 신경세포가 광범위하게 파괴돼 1~6단계 중 6단계의 알츠하이머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중증 치매 증상을 보이던 수녀의 뇌는 1~2단계 알츠하이머로 진단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연구팀은 뇌 신경세포가 파괴됐지만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수녀는 생전에 항상 낙관적-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반대의 경우엔 항상 부정적이었고 우울해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것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즉 생물학적 뇌 세포 파괴 정도와 겉으로 드러나는 치매 증상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때로는 마음 자세와 생활하는 환경이 치매의 발현(發顯)을 억제하기도 촉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속적인 두뇌 활동도 알츠하이머 발병을 어느 정도 예방할 것으로 의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람의 뇌는 사용하면 할수록 발달하고, 게을러지면 금방 위축된다. 실제로 지적활동과 알츠하이머 발병률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여러 조사결과에 따르면 독서, 바둑, 카드놀이, 글쓰기, 산수, 암산, 악기연주, 그림그리기 등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낮다. 평생 주판을 두드리며 가게를 운영한 사람은 치매에 걸렸어도 계산능력만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 등의 사례가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뇌 세포는 모두 죽었지만 계산하는 세포만은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세계의 명산 이름을 수백-수천개식 암송했다는 고 서정주 시인의 치매 예방법도 본받을 만 하다.

그 밖에 바둑, 장기, 댄스 등 취미활동을 권장하거나,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뜨개질, 청소 등 집안일을 맡기는 것도 치매 예방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용돈 등 소규모의 돈을 직접 관리하게 하는 것도 좋다. 두부손상, 고지혈증, 음주, 흡연, 우울증 등을 예방하는 것도 알츠하이머 예방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병의 조기 진단도 중요하다. 비록 예방할 순 없다고 해도 아주 초기단계에서 발견하고 약물치료를 통해 병의 악화속도를 최대한 늦추면 치매의 재앙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현재 알츠하이머를 확진할 수 있는 임상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후(死後) 대뇌 조직을 병리검사해야만 확진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의사들은 자세한 병력(病歷) 청취와 신경심리 검사만으로도 치매를 진단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뇌파 검사, 뇌 MRI 검사, 뇨검사, 흉부X선검사, 심전도 검사 등을 하게 된다. 최근엔 유전자 검사나 양전자방출단층촬영술(PET)로 알츠하이머를 보다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혈관성 치매는 발병 원인과 예방-치료법 등이 뇌졸중과 상당부분 겹치므로 여기선 몇가지 중요한 점만 지적해 보자. 한가지 강조할 점은 혈관성 치매는 예방이 가능하고, 치료를 통해 병의 악화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치매는 예방도, 치료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알츠하이머에 국한된 얘기다. 작은 뇌경색이 무수히 반복돼 일어나는 게 혈관성 치매이므로 뇌졸중을 예방하면 혈관성 치매도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알츠하이머와 혈관성 치매의 비율이 절반 정도씩므로, 절반 정도의 치매는 개인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예방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뇌졸중을 유발하는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흡연, 과음, 비만 등의 위험요인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라도 치매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고혈압 등의 치료에 힘쓰고, 생활습관을 개선해야 한다. 특히 가벼운 뇌경색을 경험한 사람과 가족들은 ‘경계태세’를 풀지 말아야 한다. 아스피린 등 항혈전제를 복용하는 등의 치료에도 충실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 보면 뇌졸중 또는 혈관성 치매가 의심되는 환자가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승용차 뒷좌석에 앉는 동작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굼뜨는 사람,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사람, 표정이 멍해지고 말수가 없어지는 사람 등은 뇌졸중이나 혈관성 치매일 가능성이 있다. 이 상태에서 병을 발견해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더 이상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 앞이 깜깜해 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을 땐 호들갑을 떨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증상이 없어지면 까맣게 잊고 지내다 ‘큰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이 치매를 키우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어머니, 내 아버님의 치매는 청천벽력과 같은 재앙일 수 있다. 단란했던 한 가정이 사분오열되고, 지난날 아름다운 기억조차 진저리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재앙을 부른 ‘원흉’으로 간주하고, 다그치고, 구박하고, 한탄스러워 한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퍼부은 화살은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

치매 환자들은 파괴돼 얼마남지 않은 뇌 세포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억해 내고, 행동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한다. 따라서 자꾸 다그치기 보단 그런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감싸줘야 한다. 대개의 경우 환자의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답답하고 화가 나서, 환자에게 무엇인가를 자꾸 기억해 보게 하고, 기억 못하면 못한다고 다그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환자에게 스트레스와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다. 그 결과 증상은 더욱 악화되고, 때로는 벽에 똥을 바르는 것과 같은 문제 행동이나 공격적 행동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가족들은 앞서 설명한 수녀연구의 결과를 곰곰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의학적으로 치매는 불치의 병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이 재앙을 피해나갈 수 없다. 피해갈 수 없다면 차라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답이다. 가족들의 따뜻하고 적극적인 이해가 어쩌면 수녀연구 사례에서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덕렬교수는

1994년 나덕렬 교수가 개설한 ‘기억장애 클리닉’에선 초진 환자에 한해, 환자 한명을 5~6명의 전문의가 약 2시간에 걸쳐 진찰한다. 국내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미국식’ 시스템이다. 미국 진찰료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한 진찰료로 이 클리닉이 굴러가는 이유는 나 교수의 고집 때문이다. 그는 치매의 진단은 값비싼 진단장비보다 환자를 관찰하고 문진하고 평가하는 게 더 효과적이며, 의료진이 환자의 가족사항, 생활환경 등을 완전히 이해할 때 최선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1976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나 교수는 혼자서 책을 보며 뇌의 신비에 침잠(沈潛)했고, 그래서 신경과를 택했다. 1993~1994년 캐나다와 미국 연수 직전까지만 해도 뇌 기능 장애로 초래되는 실어증(失語症)에 관심이 많았으나, 그곳에서 치매로 전공을 바꾸었다.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치매가 그의 호승지벽(好勝之癖)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연수를 위해 미국 임상 면허까지 획득한 그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벽안(碧眼)의 치매 환자를 진료했으며, 그곳의 시스템과 노하우를 그대로 옮겨와 환자를 돌보고 있다.

1994년 귀국한 나 교수는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치매의 한국적 진단-치료기준을 마련하는데 노력해 왔다. ‘한국판 보스톤 이름대기 검사’, ‘서울 신경심리 선별총집’, ‘한국판 웨스턴 실어증 검사’ 등 치매 진단용 각종 언어·인지검사 도구가 그의 노력으로 보급됐다. 또 지난 1998년부터 매년 10여편씩 지금껏 51편의 연구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학술활동에도 탁월한 업적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1999년엔 그의 연구논문이 ‘아카이브스 옵 뉴롤로지’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나 교수는 2003년 2월, 성균관대 의대 첫 졸업생이 뽑은 ‘올해의 스승상’을 수상했다. 그 만큼 제자 교육에 쏟는 그의 열정과 노력은 남다른 데가 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그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능한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수련 과정을 꼼꼼하게 준비하며, 그 소문을 듣고 다른 대학병원의 수많은 전공-전임의조차 그에게 몰려와 배움을 청하고 있다. 매년 삼성서울병원 기억장애 클리닉에는 타 병원서 파견된 전공-전임의가 15~20명씩 수련을 받는다.





치매가 의심되는 10가지 증세

1. 최근 일어났던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치매의 가장 흔한 초기 증세.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정도가 심하고, 건망증이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2. 익숙하던 일을 못한다=요리기구나 세면도구 등 매일 쓰던 것들의 사용법을 모른다.

3.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한다=평소에 쓰던 간단한 말 대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

4.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없어진다=자신이 살던 곳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가는 방법을 모른다.

5. 판단력이 흐려진다=날씨에 따라 입을 옷을 맞춰 입지 못하거나, 돈의 가치를 헷갈려 한다.

6. 사고력이 떨어진다=수의 개념이 없어지고,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

7. 물건을 엉뚱한 데다 갖다 놓는다=다리미를 냉장고에 넣거나, 열쇠를 싱크대에 넣는다.

8. 기분과 행동에 변화가 온다=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다가도 웃는다.

9. 인격의 변화가 온다=의심이 많아지고 가족에게 지나치게 의지한다.

10.자발적으로 뭘 하려는 의지가 없어진다=매우 수동적이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나덕렬 교수(삼성서울병원 신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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